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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파랑

성우야

주파수 간섭-1

성우야, 그거 알아? 사실 나는 너를 이해해.
많은 이와 두루두루 잘 지내고 싶다가도 도망가고 싶은 너를. 보이지 않는 서로의 거리를 밀고 당기며 너의, 나의 자리를 박제하려는 너를. 말로는 이해하고 싶다 하지만 언제나 네가 만든 틀 안에 나를 가두고 바라보는 너를. 내겐 어울리지 않는 그 틀이 싫어 늘 미묘한 답만을 내놓는 나를, 그럼에도 떠나지 못하는 너를. 네 공허를. 외로움을. 전부 이해해. 네가 이걸 듣고 아니라 한다 하더라도. 혹은 네 기대에 미치지 않는 사람이라 실망한다 하더라도. 그것마저 이해해.
너라는 사람을 마침내 정의하고 말았거든.
그래. 결국 넌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야

주파수 간섭-2

“―형. 지금 무슨 생각 해요?”
최성우의 짙은 눈동자가 신파랑을 향했다. 그보다 한 뼘 작은 사람 때문에 고개가 기울어진 채. 검은 머리칼이 눈앞으로 쏟아졌다. 뒤늦게 낮은 시선이 그를 마주 보면,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이 거기 있었다. 그래도 요즘 들어서는 이 천재 연출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만족감. 신파랑은 단둘이서 비를 피할 수 있는 이 공간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까지나 그의 추종자인 사내가 홀로 떠올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하늘이 찢어진 듯 무섭게 비가 내렸다. 그 바람에 신발이고 바지고 온통 젖어 들었다. 둘 사이 한참이나 오가는 말 없이 그렇게 가까이서 상대의 체온을 느끼며 서 있었다. 이젠 물속을 걷고 있는지, 물속에 살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 될 정도로. 두 사람의 바지는 똑같이 무릎께까지 물기 머금어 짙게 물들었다. 어느 하나 다름없이 서로를 닮아 있었다. 다른 재질에다가 다른 품의 옷이지만. 은근하게 같은 색깔이 되어버린 그들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듯이.
마침내 신파랑의 입이 예고도 없이 열렸다. 다만 흘러나온 말이라곤.
“성우야. 너는 바람 많이 부는 들판의 풀잎이 왜 흔들린다고 생각해?”
“또 알아듣기 힘든 얘기만. ……글쎄요. 진지하게 생각할까요.”
응. 그래 주면 좋겠네. 그의 답을 기다리는 듯, 신파랑은 다시금 입을 꾹 다물었다. 금세 시선은 정면. 둘은 호숫가에 우산 하나 나누어 쓴 채 나란히 서 있었다. 비 소식을 듣지 못했는지 최성우가 우산을 급히 꺼내 들 동안에도 신파랑은 멀뚱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고 어깨고 젖어 들자 축축한 어깨를 감싸안으며 당겨왔다. 같은 지붕 머리에 이고 숨을 나누었다.

주파수 간섭-3

“…꺾이지 않고 싶어서. 혹은, 그 자신의 뜻을 굽히고 싶지 않아서?”
“어우……. 너답지 않네. 좀 더 재밌는 답을 들려줄 줄 알았어.”
“나는 형처럼 은유의 미묘한 면을 자유자재로 다루진 못하거든요. 꽤, 많이. 형 생각보다도 더 평범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같은 길을 걸을 수도 없구요. 뒷말은 삼킨 채. 잠시 숨 고르는 남자의 고개가 아래로 더욱 기울었다. 이제 시선은 발치에 떨어진 채. 흠뻑 젖어버린 신발 위로 빗방울 떨어지는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왜인지 그게 꼭 신파랑처럼 보여서. 소리도 없이 제게 스며드는 저 사람 같아서. 나지막한 웃음소리 들려올 때까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기억하고 싶어서 그런 거래.”
“……기억한다고요.”
그래. 그럼 뭐를요? 뭐긴 뭐겠어. 생각해 봐. 저 하늘 아래 연둣빛 들판이 있는 거야. 키 큰 들풀이 무릎 위로 올라오겠지. 그 위를 바람이 지나가. (“다른 건 없고요?”묻자 “응. 그것뿐이야.”하며 짤막한 답이 돌아왔다. 다시 물어오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조근조근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 들풀이 볼 수 있는 거라곤 땅과 하늘, 그리고 자기랑 똑같이 흔들리는 다른 들풀뿐이야. 그럼 가끔씩 찾아오는 바람이 반갑지 않겠니. 늘 곁에 있는 게 아니거든. 자기랑 똑같지도 않아. 근데도 자꾸 찾아와. 언제 없어질지도 모르면서.
이제 어둑한 호수는 사라진 지 오래. 두 사람은 찬란하게 빛나는 벌판이었다. 홀로 우산을 들고 서 있는 그의 앞에 검은 남자가 서 있었다. 신파랑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표정을 지은 채였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를 보며 작게 웃고 있었다. 저 형이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구나. 늘 죽상에 우울해 보여서. 저런 건 저 형한테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파수 간섭-4

그 순간 최성우는 신파랑의 말에 담긴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들풀은 바람의 온기를 기억하고 싶은 게 아닐까. 놓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상대를 붙들고 싶어서. 바람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그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거야.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고 싶어서.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몰라서.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서 바람을 기다리는 거지.
그러나 떠오른 것들을 그대로 말로 꺼낼 수는 없었다. 신파랑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면, 그저 틀리다고만 할까. 혹은 이것마저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고 할까. 머뭇거리던 사이 햇빛이 점멸한다. 들판이 흩어진다. 바람이 눅눅해진다. 그리고 신파랑은. 그는 최성우를 보고 있지 않았다. 고개 들어 올린 채 병든 가로등처럼 맥없이 깜박이는 태양을 꼿꼿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쏴아아―.
여전히 차가운 빗소리가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신파랑이 창조한 그의 세계는 빗물에 녹아 없어졌다. 그리고 눈꺼풀 너머로 사라진 황록빛 들판과 검은 사내는. 우중충한 하늘 아래 오롯하게 빗물을 받아내는 호수 저편으로 가라앉았다. 슬슬 추워지네. 돌아갈까. 그 목소리에 홀린 듯이 고개 끄덕였다. 기어코 가질 뻔했던 것을 놓쳐버린 기분이었다.
형. 저는요 아직도 형을 잘 모르겠어요.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이해하지 못했어요. 한 개도. 절대로요. 어떻게 하면 형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내가 전하는 감정이 주제넘은 짓은 아닐까요. 실은 형이 바라지도 않는 것들을 억지로 쥐여주고 있는 건. 그런 건 아닐까요. 말해주세요. 제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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